25/02/15
고성의 겨울은 비수기.
여름의 분주함과 비교해보면 휑 할 정도로 사람이 없다.
그런 비수기에 별 특별할 것 없는 하루하루를 보낼 것 같지만, 매일의 특별함은 있다.
이번주도 크고 작은 일들이 있었지만 오늘은 설악산 대청봉 등반 후기로 집중.
이 다큐에서부터 시작이었다.
22년 여름, 고성에 오고 한번은 대청봉을 가봐야지 벼르다 새벽 4시에 깨서 잠도 오질 않는 핑계로 처음 도전.
침대에서 대충 코스를 찾아보고 오색코스가 가장 짧다고 하길래 오색으로 출발했다.
그게 문제였다.
오색은 정말 끝도 없는 오르막과 조망이 터지지 않는 돌계단 코스.
심지어 대청봉 정상은 바람이 너무 심해 서 있을수 없을 정도의 날씨였고 정상만 찍고 바로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이 더 힘들었던.
그래도 꽤 많은 산을 가봤지만 설악산 대청봉은 가장 힘든 산이었다.
헌데 저 다큐를 보고는 봉정암을 너무 가고 싶어서 그 힘든 기억을 잠시 잊었다.
(지난 22년 여름의 오색코스 기록)
그래도 그때의 힘듦이 무서웠어서 이번 봉정암은 1박 2일로 계획했다.
소청대피소에서 자고 아침에 대청봉 일출을 보고 내려오는 코스로 정하고 소청대피소도 예약을 마쳤지만,
내가 가려고 했던 월요일 아침 대청봉의 기온은 -17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고민 고민 끝에 대피소는 취소하고 급 당일산행으로 변경.
오색의 무서움을 알기에 소공원에서 올라가서 대청봉 - 봉정암을 들려서 백담사로 내려오자.
겨울이 끝나기 전에 산방기간이 오기 전 오늘이 딱 마지막 기회다 싶어서 새벽 4시에 일어나 채비 후 소공원으로 출발.
구름이 좀 있을거란 예보가 있었지만, 영상의 기온이었다.
주차장에 도착시간은 5:40이었고 이 시간에도 주차아저씨는 있었다.
주차비 만원을 내고 앞에 있는 작은 기념품 & 슈퍼에서 물, 양갱, 초코바를 샀는데 9천원이 나왔다.
왜 출발할때 집 앞에서 안샀지라는 후회가.
입구에서 대청봉까지의 이정표는 10.9km
지난 번 오색이 왕복 15km 였는데 편도가 10km가 넘다니.
심지어 내려오는 백담사 코스는 더 길다고 하는데 할 수 있을까 라는 걱정이.
조금 걷기 시작하면서 걱정보다는 무서움이 먼저였다.
주말이고 하니 사람이 좀 있겠지 했지만 오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코스 안내도를 보다보니 뒤에서 사람이 올라 오길래 ‘저 분 따라가야지’ 했는데 그 분은 다른코스로 가버렸다.
동이 틀때까지 계속 땅만 보고 걸었다.
비선대를 얼마 앞두고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초반 코스는 계곡을 끼고 가는 코스라 날이 밝았으면 멋있었을텐데.
날이 밝아지면서 무서움은 사라졌지만, 앞으로 가야 할 코스를 보아하니 그게 더 공포였다.
비선대를 지나면서 부터가 오르막의 시작이었다.
끝도없는 철계단을 오르는데 그래도 지난 번 오색의 돌계단 보다는 낫다는 위안을 삼으며 계속 걸었다.
높은 봉우리에 점점 해가 비추기 시작했고, 첫번째 대피소인 양폭 대피소가 나왔다.
아이젠 차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여기까지는 어찌어찌 왔는데 대피소에서 아이젠 착용 후 다시 출발.
해가 비치는 천불동 계곡은 역시 멋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봉우리들이 올라 가야 할 곳 이라는게 걱정이긴 해도 보이는 장면들 덕분에 힘든 것도 잊었다.
여름에 오면 더 멋지겠지 라는 위험한 생각을 잠시 했었다.
양폭을 지나 희운각을 향해.
여기서부터가 진짜였다.
내딛는 걸음마다 너무 힘들었다.
심지어 눈이 쌓인데다 내려오는 썰매족들 땜에 반지르르 다져진 눈은 힘듦을 배로 만들었다.
나는 안다 저 3.6km가 지금까지 3.6이랑은 다르다는 걸.
예전에 마라톤 신청하고 받은 아미노 젤.
집에 있길래 챙겨왔는데 잠시 쉬어서 그런지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먹고 좀 기운이 나는 느낌이었다.
소청까지 올라가는 길은 정말 포기하고 싶게 만들었다.
아직 정상을 찍지도 못했는데 내려올 걱정부터 하고 있었다.
심지어 가는길에 장갑을 하나 잃어버려서 한손은 맨손으로 올라갔다.
장갑이 없으니 포기 할 구실이 좋았다.
소청까지만 가보자는 심정으로 일단 올라갔다.
가는 내내 보이던 뷰.
분명 오색에서는 아무것도 안보였는데.
이거 하나만으로도 지난 시간을 다 보상받은 기분.
그만큼 멋있었고 그만큼 힘들었다.
드디어 소청에 올랐고, 그제서야 보이는 봉정암 이정표.
이번 산행은 대청봉보다 봉정암이 목표라 그냥 내려갈까 백만번 고민.
오른쪽 허벅지 부터 무릎 통증이 너무 심했다.
가만히 서있으면 더 아파서 어떻게든 걸어야 했는데, 백담사까지 11.7km를 갈 자신은 없었다.
그리고 반대편 뒤로 보이는 중청대피소와 대청봉.
하산하기 가장 빠른 코스는 악몽의 오색.
오색을 가려면 어쨌든 대청봉을 넘어야 한다.
바로 앞에 보이지만 오르막은 이제 정말 절대 못할 것 같지만, 11.7km의 하산보다는 나으리라 판단했다.
어쩔 수 없이 올랐다, 대청봉으로.
결국 올랐다, 대청봉.
여기까지 와서 안가는게 말이 안된다 하지만 당시에는 정말 조금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정상석에서 사진을 절대 안찍는 편인데, 너무 힘들어서 지나가는 분께 부탁해서 한 장 남겼다.
정말 설악산은 너무 애증이 가득한 산이다.
대청봉에서 보는 뷰는 또 달랐다.
이래서 사람들이 나같은 심정으로 오려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직 엄두도 못 내는 공룡능선 부터 다시 와야 할 봉정암 까지.
몇몇 코스가 남았는데 당분간은 머리속에 지워야 겠다.
결국 하산길은 오색으로.
내려가기 전 너무 허기져서 현창 형님께 구매한 빵과 집에서 담아 온 커피를 마셨다.
진짜 너무 맛있었지만, 3조각만 먹고 다시 출발.
차는 소공원에 있고 오색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하고 급하게 사장님께 헬프 외쳤다.
강릉에 있다가 오는 길에 픽업 허락은 받았고 늦지 않게 도착하려면 그 미친 돌계단을 쉬지 않고 가야한다.
하산 전 가방을 정리하다 보니, 쓸데 없는 짐이 너무 많았다.
장갑은 여벌로 하나가 더 있었고 필름카메라도 챙겨왔지만 한 번 꺼내지도 못했다.
심지어 20000짜리 벽돌같은 보조배터리 까지.
우겨 넣으면서 진곤이 형이 같이 왔으면 또 혼났겠지 생각했다.
그렇게 쉬지 않고 내려와 만난 나의 구원자 x.
열심히 하겠습니다.
끝으로 오늘의 등산기록.
6498이라는 숫자가 오늘의 모든 걸 보상해 주기를.